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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교육

성공한 기업가 사례 / '정주영' 그는 누구인가

by foryourinformationisgood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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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

 

 정주영은 1915년 함경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서울에서 쌀 배달원으로 일한 지 4년 후 그가 일하던 쌀 소매점을 인수하여 '경일 상회'를 창업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자동차 수리업체인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창업한 후 '현대 토건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1950년 '현대건설 개칭된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당시 미군 통역으로 일하던 동생 정인영의 연결로 미군들의 숙소 건설사업을 필두로 많은 건설공사를 수행하게 된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미국의 포드자동차 회사와 자동차 조립기술 계약으로 자동차 생산을 시작하였는데, 1976년 포니를 미국에 성공적으로 상륙시켜 한국을 자동차 수출국이 되게 하였다. 1973년에는 '현대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 분야의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정주영의 첫 번째 기업가정신은 명확한 비전 제시, 불굴의 개척정신, '하면 된다'는 신념에 찬 강한 추진력이다.

 정주영은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통하여 현대가 한국 경제를 선도하고 세계적인 기업이 된 원동력은 진취적인 기상과 불굴의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뒤떨어져 있는 분야라고 주저한다든지, 미지의 분야라 두려워한다든지, 힘들다고 피한다든지 하는 것은 패배주의일 뿐이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황무지나 다름없던 한국 공업 사회에서 건설 분야를 개척했고, 조선공업을 일으켰고, 자동차공업의 활로를 개척했다.
 현대자동차 설립 당시에 그는 국내 생산기술이 미비했고 국내 내수시장도 취약했는데 향후 경제를 주도할 전략사업으로 예견하여 10만 대의 공장을 설립했고 자체 모델인 포니의 양산체제에 돌입하는 등 과감한 투자를 했다. 그만큼 자기 비전을 명확히 가졌기 때문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투자 설비를 했다. 이런 비전은 기업경영의 이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현대그룹의 형성 발전에 중요한 성공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현대조선은 설립 당시 논리적으로나 학문적 계수로는 분명히 안 될 일이고 못 할 일이라고 말이 많았지만 무수한 난관을 극복하여 세계 제일의 조선소가 되었으며, 해양개발 역시 온 세계가 다 무모하다고 평가하는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그 분야의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였다. 

정주영의 두 번째 기업가정신은 창의력이다.

 정주영은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창의력을 가진 기업가이며 창조적 기지를 소유한 기업가이다. 창의력을 보여 준 대표적인 예로는 '오백 원 지폐 속의 거북선'과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 및 '미군 묘역 단장 공사'이다.
 국내외적으로 조선업 진출에 대한 환경이 부정적이고 조선소 건립을 위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정주영 회장은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영국의 바클레이스 은행에 찾아가 거북선이 그려진 한국의 돈 500원짜리 지폐를 내놓고, "이것이 우리의 거북선이요, 영국의 조선 건조 역사는 1800년대라고 알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요, 우리가 당신네보다 300년이나 조선 건조 역사가 앞서 있었소. 다만, 그 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의 능력과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우리의 잠재력은 그대로 있소."라고 설득하여 투자를 끌어냈다.
 울산의 황량한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는다며 500원 지폐의 거북선 그림을 꺼내 들고 영국의 은행가들을 설득했던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 회장의 창의적 정신이 없었다면 세계 1위 조선 강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의 최종 물막이 공사에 이른바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는 폐유조선 공법을 시도한 것도 정주영 회장의 창의력에 기인한 것이다. 방조제 최종 물막이 공사는 절대 만만치 않았다. 물살이 매우 거세어 승용차만 한 바윗덩이도 들어가자마자 흔적도 없이 쓸려 가는 정도여서 현대식 장비를 전부 갖추고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고심하던 끝에 해체해서 고철로 팔아먹을 생각으로 구입한 스웨덴 고철선 워터 베이 호를 끌어다 물줄기를 막아놓고 양쪽 방조제에서 바윗덩어리를 투하시키면 성공적으로 물막이가 마무리되리라는 아이디어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또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한국전쟁에서 순직한 미군 병사들의 무덤인 미군 묘역을 참배하게 되었는데 전쟁 중에 잔디가 없는 급조된 황량한 묘역에 이국땅에서 죽은 미군 병사들의 묘역을 어떻게 해서라도 파란 잔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묘역 단장 공사를 현대의 정주영 회장에게 부탁하였다. 정주영 회장은 트럭 30대를 동원하여 낙동강 연안에 펼쳐진 파란 보리밭으로 갔다. 30대 트럭에 파란 보리를 싣고 와 유엔군 묘지 잔디 공사를 성공리에 마쳤다. 파랗게 단정된 묘역을 둘러보며 미 8군 관계자는 감탄을 연발하였다고 한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아라.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가야 한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세 번째 기업가정신은 환경 적응능력과 혁신성이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가면서 혁신을 지속해서 실행하였으며, 진취적인 기상과 개척정신, 열정적인 노력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열심히 활용해서 가능성을 가능으로 이루었던 것이지 결코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목표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이에 상응한 노력만 쏟아부으면 누구라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이처럼 정주영은 모험적, 적극적 의지와 성취욕구가 강하고, 신용을 중하게 여기고 근검절약하는, 그리고 창의력과 진취성을 지닌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현대의 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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